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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공동체 > 함께하는여정
제 목 제29과 위대한 신앙의 증거자
  작성자 : 교 육 작성일 : 2009-04-24 조회수 : 2351 회
 

제29과 위대한 신앙의 증거자


129. 가경자, 복자, 성인은 어떤 분입니까?

  교회는 순교로써 하느님을 증거한 분들이나 탁월한 덕행으로 신자들의 모범이 되는 분들을 가경자, 복자,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1)가경자(可敬者): 교회가 가히 공경할 만한 분에게 드리는 경칭입니다. 대부분 시복식 전 복자품에 오를 분들이 한시적으로 가경자로 불립니다.

  2)복자(福者):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뵈옵는 복된 영광을 누린다고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분에게 드리는 경칭입니다. 복자는 성인과 달리 세계교회 어디에서나 공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지역에서 공경을 받습니다.

  3)성인(聖人): 교회는 순교나 덕행으로 뛰어난 성성(聖性)을 드러낸 분을 시성(諡聖)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범으로 선포합니다. 성인은 전 세계교회의 공경을 받으며 우리는 그분들게 전구를 청합니다.

  한국천주교에서는 기해박해(1839)에 순교한 분들 중 82명이 1857년에 가경자로 선포되었습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들 중 복자 79명이 탄생하였고, 이어 1968년 10월 6일 병인박해 순교자들 중에서 24명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복자에 대한 시성식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기해박해 이전의 초기 순교자들과 병인박해 이후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 시성 절차가 준비 중입니다.


130. 순교자는 어떤 분입니까?

  교회 안에는 신앙을 위해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순교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가장 위대한 증거가 되며, 세 가지의 조건을 전제로 합니다. 먼저 참으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신앙 때문에 순교해야 하며, 외부의 압력이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상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피흘림과 참순교’를 한 순교자들을 공경하며, 유해를 중심으로 하는 공적 전례예식에도 마련하였습니다.

 사도들에 의해 일곱 부제 중 하나로 선발된 성 스테파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제일 처음 순교한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면서 돌아가신 것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와 교회에 대한 박해를 계기로 초대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초기 한국천주교 역사에서도 박해로 인하여 수많은 순교자가 생겨났고, 순교의 얼 안에서 한국천주교가 성장하였습니다.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살 수 있었는데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를 거부하고 온갖 모진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순교자들 중에는 13세 소년 유대철 베드로를 비롯하여 80세 노인까지 있었고, 신분이나 직업 역시 다양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덕행 그리고 순교로 성인 ․ 성녀 반열에 오르신 분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희생과 봉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이를 삶에서 실천하는 참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131. 천주교는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졌습니까?

  약 220여 년 전 실학자들이 중국에서 전래된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조선시대 정치와 문화는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명분만을 내세우는 주자학이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자, 남인학자들을 중심으로 실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벽,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가환 등의 유학자들은 함께 토론하면서 서학을 연구하였습니다. 이처럼 남인학자들은 처음에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접하였지만, 차츰 천주교의 신앙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1783년 북경으로 가서 서양인 신부에게 교리를 배우고 1784년 봄,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승훈은 이벽, 정약종, 권일신, 권철신 등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은 1784년 겨울에 서울 명례동(지금의 명동)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모여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주일을 지켰습니다. 이로써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진리를 찾다가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전 세계교회 역사에서도 유일한 경우입니다.


132.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습니까?

  서구사상인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약 100년 동안 박해가 있었습니다. 박해의 원인으로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사상의 차이 때문입니다.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전통적인 조선의 유고사상과 박애를 근간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이 충돌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므로, 양반과 천민의 신분적 차별을 부정했습니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다름없는 인격체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부부간 화목과 이해를 강조하여 남편은 아내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학대하지 못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아내가 자식을 못 낳는 것을 이유로 구박하거나 유기하는 행위를 엄금하였습니다. 과부의 재혼과 독신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으며, 결혼에 있어서도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혼인을 금지하였습니다.

  둘째, 천주교 신자들이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인 조상제사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충효사상을 중히 여겨 조상제사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황청에서는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겨 금지시켰습니다. 이에 초기 한국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조상제사보다 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인간 존엄성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라고 부르며, 믿음을 버리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셋째, 당파싸움의 방편으로 이용되었고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이 표출되었기 때문입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시파와 벽파간의 정쟁 중에 일어났고, 1839년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의 세도권 쟁탈전 가운데서 발발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는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제지하고자 천주교에 접근 하려던 흥선대원군이 유림과 반대세력에 부딪히면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집권을 강화하고자 자행한 정치적 타산의 결과였습니다.


133.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누구입니까?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최초의 한국인 사제이며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분입니다.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과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836년 부활절 즈음에 충청도 골배 마실 은이 공소를 방문한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1837년부터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 조선인 신학교에서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철학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1838년 11월 27일 신학생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한 후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프란치스코는 1841년 11월 철학과정을 마치고 신학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844년 신학과정을 마치고 부제품을 받았고,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조선입국을 시도, 10월 12일 강경 근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여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교로부터 위임받은 선교사 영입을 준비하던 중 1846년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었고, 해주로 이송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3개월 동안 40여 차례의 문초를 받았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으며, 다음 날인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소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1857년 가경자(可敬者), 1925년 7월 5일 복자(福者), 1984년 5월 6일 성인(聖人) 반열에 올랐습니다.


134.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누구입니까?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초기 한국천주교회를 널리 알리고 확산시킨 분으로, 103위 성인 중 한 분입니다.

  1795년 순교자 정약종 아구구스티노와 성녀 유 체칠리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순교자 정철상 가롤로의 아우이며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의 오빠입니다. 온갖 비난과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켜 나가는 부모의 모범을 따라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우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침체되어 가던 교회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교회를 이끌어갈 성직자가 없었는데, 정하상 바오로가 초기 한국교회의 실제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1816년 겨울부터 북경을 왕래하면서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1824년-1825년경 교황에게 한국교회의 상황을 전하고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썼습니다.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는 데 크게 공헌하였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체포될 경우에 대비하여 박해자들에게 줄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썼습니다. 1839년 7월 11일 체포되어 모진 문초를 받고 추국을 당하다가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135. 한국천주교회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1784년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220여 년 동안 천주교는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성장 ․ 발전하였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1801년 신유박해, 1815년 을해박해, 1827 정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겪은 후에, 나라에서 실시한 개화정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조선의 문화가 개방되면서 신앙의 묵인 내지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을 시작하고, 많은 지방에 복음을 전하며, 교육사업과 계몽운동을 펼칩니다. 교회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거듭합니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북한교회는 전멸위기에 놓이고, 남한교회 역시 커다란 피해를 입습니다.

  1962년 한국천주교회는 교황청으로부터 자립능력을 인정받아 정식 교계제도를 설정하면서 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으로 우리말 미사를 거행하는 등 여러 면에서 발전합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사회복지활동에 참여하고, 1970년대 이후에는 인권운동과 사회정의운동에 가담하여 사회복음화에 주력합니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창설 200주년을 기념합니다. 이때 103위 순교복자가 성인으로 시성됩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생명 및 환경운동 등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구별로 시노드를 개최하고 후속실천과제를 실행해 나감으로써, 하느님 백성 모두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며 교회 대내외적 쇄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6년 12월 현재 남한에 대교구 3개, 교구 13개, 북한에 교구 3개가 있고, 신자 수는 남한만 대략 470만 명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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